좋은 작가와 책 소개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총정리!

힐링북 2021. 10. 8. 22:30

오늘은 독일계 스위스인 소설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헤르만 헤세가 1922년 발표한 성장소설로, 동서양의 무르익은 깨달음을 자기 체험 속에 융화시켜 진정한 내면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길을 안내하는 경이로운 인생책, ‘싯다르타(Siddhartha)’를 소개해 드릴게요.

인도와 중국의 철학 및 정신 세계에 평생을 몰두한 헤세의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Johannes Hesse)

 

저명한 인도학자였던 헤세의 외할아버지 헤르만 군데르트 (Hermann Gundert)

헤르만 헤세는 인도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며 인도와 중국의 철학 및 정신 세계에 평생을 몰두한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Johannes Hesse, 1847~1916)와 선교사이자 저명한 인도학자였던 외할아버지 헤르만 군데르트(Hermann Gundert, 1814~1893)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기독교뿐 아니라 인도의 종교와 정신 세계를 배웠는데요, 이밖에도 공자와 노자, 장자 등 중국 철학과 사상에도 조예가 깊어 이토록 매력적인 소설을 빚어낸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헤세가 싯다르타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19년부터인데요, 주인공 싯다르타가 끊임없이 고뇌하고 투쟁하는 금욕주의자로서 나타나는 부분, 즉 싯다르타의 사문 생활까지 쓰고 난 다음, 스스로의 체험 없이 작품을 계속 집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느껴 1년 반의 자기 체험 기간을 거친 후에야 긍정하는 자로서의 싯다르타의 세속 생활을 다시 쓰기 시작하여 드디어 1922년 출간됩니다.

헤세의 동서양을 넘나드는 영원의 시선과 초월의 의지, 치열한 인간의 내면 탐구는 싯다르타를 통해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신적인 총체성을 완성하는 숭고한 사랑으로 승화되어,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럼, 동서양의 정신적 유산을 시적으로 승화해 또 하나의 붓다를 창조하며 문학의 종교적, 철학적 지평을 넓힌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 ‘싯다르타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제1부>

 

인도의 가장 높은 계층인 바라문의 훌륭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싯다르타는 같은 바라문 계층으로 그를 흠모한 친구, 고빈다와 함께 자랍니다. 고매한 정신과 의지를 가진 잘생기고 예의 바른 싯다르타를 모든 사람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싯다르타는 항상 헛헛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존경할만한 아버지와 그 밖의 여러 스승들에게 그들이 가진 최고의 지혜를 전수받았지만, 그의 그릇은 가득 차지 않았고, 그의 목마름과 고뇌는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가르침들에 의문을 품고, 자아의 가장 궁극적인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으나, 자아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을 아버지도, 스승인 현인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출가하여 도를 닦는 사문(沙門)들이 싯다르타가 살고 있는 도시를 지나갑니다. 싯다르타는 그들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밤새도록 서서 시위한 끝에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내 진정한 자아 속 근원적 샘물을 찾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이때, 친구 고빈다가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릅니다.

 

싯다르타에게 세상은 쓴맛이 났고, 인생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극심한 고통이었기에 그는 사문들과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비우는 수행을 합니다. 만약 일체의 자아가 극복되고 사멸된다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욕망과 충동이 침묵한다면, 틀림없이 궁극적인 것, 이제 더 이상 자아가 아닌 것, 그 위대한 비밀이 눈뜨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초탈과 침잠 수련을 하여 자유자재로 어떤 대상이든 그 속에 들어가 그것과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르러도, 매번 깨어나면 다시 자아로 돌아와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한 채 발버둥치며 시간의 속박에 갇힌 한계를 절감한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앎뿐이며, 그것은 도처에 있고, 그것은 나의 내면과 자네의 내면, 그리고 모든 존재의 내면에 있는 것이지. 그래서 난 이렇게 믿기 시작했네. 알려고 하는 의지와 배움보다 더 사악한 앎의 적은 없다고 말이야.”

두 젊은이가 사문들과 수행한 지 3년 정도 지났을 때, 인도 전역에 소문이 떠돕니다. 고타마란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세상의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킨 세존, 부처라는 것입니다. 고빈다는 부처에게 가서 가르침을 들어보자고 제안했고, 둘은 고타마의 체류지인 기원정사를 찾아갑니다. 싯다르타는 벌떼처럼 몰려든 사람들 속에서 모든 행동이 평화와 완성을 의미하는 고타마를 곧바로 알아보며, 참으로 성스럽고 진실된 분이라 여기며 존경과 사랑을 느낍니다.

 

그의 고요한 설법은 잔잔하고 맑게 흐르는 물처럼 거침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은 온통 번뇌로 가득 차 있는데, 부처의 길을 가는 자는 번뇌를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빈다는 탄복하여 세존과 그분의 가르침에 귀의했지만,해탈은 스스로의 구도 행위로부터, 생각과 침잠, 인식과 깨달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지 누군가의 가르침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한 싯다르타는 완성자인 부처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고빈다를 뒤로한 채 숲을 떠납니다.

 

싯다르타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 막상 자신에 대해 가장 적게 알고 있다는 사실, 그 동안 자신을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해 자아를 산산조각 부숴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내는 짓을 하다 스스로가 없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앞으로는 나 자신한테서 배울 것이며,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나 자신의 비밀을 알아내야지 결심하며 지금 여기에 싯다르타가 있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신적인 것의 본성이요 의의였던 것을 깨닫습니다. 의의와 본질은 사물들의 배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 속에, 삼라만상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미리 추측한 뜻에 짜맞추기 위하여 이 현상계를 착각이라 일컬으며 자신의 눈과 혀를 우연하고 무가치한 현상이라 일컬었던 미몽에서 깨어나 다시 태어난 것을 느끼며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제2부>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싯다르타는 무엇인가를 추구함 없이, 단순 소박하고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이 정말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의 눈에 빛과 그림자가, 그의 마음에 별과 달이 퍼져나갔습니다. 예전엔 사색의 그물로 붙잡으려 했기에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이 곧 영원한 본질에서 생겨난 아트만(ātman)이란 사실을 느끼며, 감각과 사유 두 가지 속에는 궁극적인 참뜻이 숨어 있기에 어느 하나도 경시되거나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싯다르타는 온화한 뱃사공의 초가집에 묵으며 날이 밝아오자 강을 건네 달라고 부탁하고, 뱃삯을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싯다르타에게 뱃사공은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온다! 이것도 강으로부터 배운 것이지요. 당신의 우정을 뱃삯으로 받은 걸로 해둡시다.”라고 말하며 친절한 미소를 건넵니다.

 

도시의 입구, 어느 숲 부근에서 잘 치장한 가마 한가운데 아름다운 여인이 타고 가는 행렬을 구경하다 그녀에게 반한 싯다르타는 그녀가 유명한 기생 카말라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찾아가 친구이자 스승이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카말라는 자신을 만나려면 좋은 옷과 신발, 선물이 필요하다 말하고,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을 잘 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싯다르타는 “사색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안다고 답하며 사랑의 시를 지어주고, 그에게 반한 카말라는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카마스와미를 추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 공손하고 상냥하게 굴되, 초라할 정도로 너무 겸손하게 굴지는 말아요. 나는 당신이 그의 하인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아요. 그와 동등한 사람이 되세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한테 만족하지 못할 거예요.”

 

카마스와미 집으로 간 싯다르타는 거의 백발이 다 되어가는 영리하고 신중한 눈, 탐욕스러운 입을 지닌 그를 만나 인사를 나눕니다. 싯다르타가 매매계약서를 잘 읽고, 글도 잘 쓰는 것을 보고 상인은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고, 하나 둘 일을 가르칩니다. 싯다르타는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었으며, 많이 듣고 적게 말하며, 그 상인에게 종속 당하지 않고 자기를 동등하게, 사실은 그 이상으로 대우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카마스와미는 자기 사업을 꼼꼼하고 정열적으로 이끌어 나갔지만, 싯다르타는 속세에 동화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마치 유희 같은 것으로 여기며 카말라의 집을 드나들었고, 그녀와 황홀한 시간을 보내며 애인 겸 친구가 됩니다. 싯다르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런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없는 돈이나 사소한 즐거움, 하찮은 체면을 얻기 위하여 애를 쓰고 괴로워하고 늙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카말라는 싯다르타를 고빈다보다 더 잘 이해하였고, 둘은 서로 닮아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내면에 가르침과 법칙을 가지고 있는 완성자인 세존 고타마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속세의 삶, 쾌락의 삶을 살며 부자가 된 싯다르타는 사문 정신을 잃고 서서히 부자들이 잘 걸리는 영혼의 병에 걸려 지치고 지겨운 기색이 역력해집니다. 그는 세상의 덫인 쾌락과 탐욕에 사로잡혀버렸습니다. 그는 침실 벽에 걸린 거울에서 더 나이 들고 흉측하게 변해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새로운 노름으로, 관능적인 쾌락과 호화로운 술잔치의 마취 상태 속으로 계속 도망쳤습니다. 그러고는 그 도피 상태로부터 다시 빠져 나와 재산 축적과 돈벌이의 충동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런 무의미한 악순환을 계속하면서 그는 지치고, 늙고, 병들었습니다.

사십 대에 들어선 싯다르타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졌고, 아름다운 카말라의 얼굴에도 고달프고 권태로운 기색과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났습니다. 한숨을 쉬며 싯다르타는 그녀와 헤어졌고, 영혼은 불쾌감과 은폐된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향락, 고질적 습관, 무의미한 생활 전체와 자신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 편안해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새벽에 잠깐 잠이 든 그는 카말라의 희귀한 새가 새장 안에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밖으로 던져버리자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치 있는 모든 것들도 송두리째 내던져버린 듯한 느낌에 고통으로 뒤범벅되어 잠에서 깨어납니다. 싯다르타는 이런 유희야말로 바로 '윤회'라고 부르는 것임을 깨닫고, 그날 밤 도시를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카말라도 싯다르타가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창가에 걸어 둔 금빛 찬란한 새장의 문을 열어 새를 날려 보내줍니다. 그녀는 이후 어떤 손님도 받지 않고 대문도 잠가버립니다. 얼마 후 그녀는 싯다르타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 강가에 이르러 타락한 자신에 대한 구토와 비참함으로 목숨을 던지고자 할 때 완전한 것, 완성을 뜻하는 성스러운 의 소리를 듣습니다. 피곤에 지친 싯다르타는 깊은 잠에 빠졌고, 깨어보니 옛 친구 고빈다가 야수로부터 그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이제 깊은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 싯다르타는 어디로 가는 길인지 묻는 고빈다에게단지 도(道)를 향해 나아가는 도중에 있을 뿐 순례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길을 떠나는 고빈다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싯다르타는 고빈다는 물론, 이 순간 자기 눈에 보인 모든 것을 기쁨이 넘치는 사랑의 감정으로 대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잠을 자는 동안 옴의 작용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매혹적인 현상의 본질로, 예전에는 마음이 너무나 병들어 사람이건 사물이건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 위해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앞으로의 길이 어떻게 나 있든 그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몸소 맛본다는 것은 좋은 일이며, 속세의 쾌락과 부의 단점을 이미 어린 시절 배웠지만, 이제야 그것을 직접 체험한 뒤 그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그 새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은 바로 자신의 작고 불안한, 자만에 찬 자아가 아닐까?생각하며, 바라문으로, 참회자로 자아와 투쟁하였지만 무엇 때문에 헛수고가 되었는지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의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과, 이 이상야릇하고 우매한 세상에 대하여 비웃고 싶은 커다란 충동을 느낍니다. 너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어!” 그는 혼잣말을 하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시선을 강물 쪽으로 향했는데, 강물 역시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강물은 언제나 밑으로 흘러 내려가면서 노래 부르고 흥겨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옛날 그 강에서 자신을 우정으로 건네준 친절한 뱃사공이 떠올라 그의 오두막을 찾아가면서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 매 순간 새롭다는 사실을 깨우칩니다.

싯다르타는 뱃사공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하였고, 스승 뱃사공 바주데바는 20여 년 전 강을 건네준 사문이었던 싯다르타를 알아봅니다. 싯다르타는 그간의 모든 일들을 이야기했고, 바주데바는 고요하게, 마음을 툭 터놓고 경청한 뒤 그를 받아줍니다. 감사를 표하는 싯다르타에게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을 가르쳐준 것은 강이었어요. 우리는 강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지요. 보세요, 당신도 이미 강물로부터 아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 가라앉는 것,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당신은 다른 것도 강으로부터 배우게 될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싯다르타는 강으로부터 고요한 마음으로 격정도, 소원도, 판단도, 견해도 없이 귀기울여 듣는 법과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밀도 배웠습니다.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지만,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나 미래의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인생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일체의 번뇌의 근원이 시간이고,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그 근원은 모두 시간이니, 인간이 시간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즉시, 세상의 모든 힘겨운 일과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닌가?생각하게 됩니다.

 바주데바의 말처럼 강에는 삼라만상의 모든 소리들이 다 들어 있었고, 그것은 성스러운 소리였습니다. 싯다르타의 미소는 점점 더 뱃사공의 미소를 닮아가 밝고 행복하게 빛났으며,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노인다워 보였습니다. 많은 여행자들이 그들을 형제라 여기게 되었고, 이제 그들에게 강물 소리는 단순한 물소리가 아니라, 생명의 소리요, 현존하는 것, 영원히 생성하는 것의 소리였습니다.

 

세존이 위독하여 곧 극락왕생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오래 전 아름다운 정원을 헌납하고 부처의 가르침에 귀의한 카말라도 11살 철부지 아들을 데리고 순례 길에 나섭니다. 그러나 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억지를 부리는 습관이 들어 자주 떼를 쓰고 심술을 부리며 무엇 때문에 자기가 낯선 성자가 죽어가는 곳을 향해 힘든 순례 여행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들은 쉬어가자며 자꾸만 졸라댔고, 카말라도 지쳐있던 터라 아들이 바나나 한 개를 먹는 동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잠시 눈을 붙이려다 외마디 비명을 지릅니다. 옷자락 밑에선 작고 검은 뱀 한 마리가 빠져 나오고, 비명소리와 통곡소리를 듣고 나루터에 서 있던 바주데바가 달려와 여인을 팔로 안아 싯다르타가 있는 오두막으로 데려갑니다.

 

싯다르타는 카말라를 당장 알아보았고, 소년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카말라는 독이 퍼져 죽어가면서 당신은 평화를 얻으셨나요?묻습니다. 싯다르타가 미소지으며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자그것이 보여요. 나도 평화를 얻을 거예요라고 말하며 눈을 감습니다.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자신의 얼굴, 둘의 젊은 시절의 얼굴이 보이며, 현재와 동시성, 영원성이라는 감정이 그의 마음을 파고들어 가득 채웁니다. 그 순간, 모든 생명의 불멸성과 모든 순간의 영원성을 깊이 느끼며 강이 들려준 단일성의 사상으로 가득 채워진 싯다르타는 아들을 선물 받았음에 감사하며 오두막에서 정성껏 키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부자들의 온갖 습관에 젖어 응석받이로 자란 탓에 좋은 음식과 푹신한 침대, 하인들을 부리는 습관에 길들여져 고통과 근심, 걱정만 안겨줍니다. 싯다르타는 이토록 맹목적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아무 결실도 없이, 그렇지만 이토록 행복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이 있었던가? 생각하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으나, 소년은 뱃삯을 모아둔 바구니를 훔쳐 나룻배를 타고 도망쳐버립니다. 그 뒤를 따라 카말라의 옛 정원까지 달려간 싯다르타는 이 장소까지 오게끔 내몰았던 욕망이 어리석음을, 자기가 아들을 도와줄 수 없음을, 아들에게 집착하고 애착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비참한 심정이 되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싯다르타는 수많은 아들이나 딸을 데리고 다니는 여행자들을 건네주며 생각합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은 애정이 가득 담긴 행복을 누리고 있는데, 왜 나는 그렇지 못할까? 악한 사람들도, 도둑과 강도들도 자식들이 있으며 그 자식들을 사랑하고 그 자식들한테 사랑을 받고 있는데 오직 나 혼자만 그렇지 못하구나.” 그는 덜 총명하고 덜 오만스러워진 대신에, 더 따뜻하고 더 많은 관심을 지닌 눈길로 그들을 보니 어린애 같은 인간들이 자기의 형제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조화, 세계의 영원한 완전성에 대한 깨달음, 미소, 단일성이 그의 내면에서 서서히 꽃피어났으며, 이 사랑의 불꽃은 저절로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싯다르타는 영원한 존재로 느껴지는 바주데바와 함께 수많은 소리가 어우러진 강물의 노랫소리에 귀기울입니다. 흘러가는 물결 속에 모두가 스스로의 목표를 향하고 있었고, 모두가 그 목표에 사로잡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살아오면서 자기가 보았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 강이 서둘러 흘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체의 소리들, 일체의 목적들,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합해져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었고, 사건의 강을 이루고 있었으며, 생명의 음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특정한 소리에 몰입하지 않고 모든 소리들을 듣고, 전체,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완성을 의미하는 ‘옴’이었습니다. 그의 상처에서 꽃이 피어나고, 그의 고통이 빛을 발하고, 그의 자아가 그 단일성 안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 순간 싯다르타는 운명과 싸우는 일을 그만두었으며, 고민하는 일도 그만두었습니다. 그의 얼굴 위에 깨달음의 즐거움이 피어났습니다. 어떤 의지도 이제 더 이상 그것에 대립하지 않는, 완성을 알고 있는 그런 깨달음이었습니다. 바주데바는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며 싯다르타에게 작별을 고하고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바주데바의 온몸은 평화의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이제 늙은 현인으로 소문난 뱃사공인 싯다르타를 찾아온 옛 친구 고빈다가 여전히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불안과 구도의 불길을 안고 조언을 구하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님은 구도 행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스님, 당신은 어쩌면 실제로 구도자일 수도 있겠군요.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있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뒤늦게 싯다르타를 알아본 고빈다가 어떤 사상이나 믿음으로 깨달음을 얻었는지 묻자 싯다르타는 말합니다. 나는 여기 이 강으로부터, 그리고 스승 뱃사공 바주데바로부터 가장 많이 배웠다네. 바주데바는 매우 소박한 사람이었지. 그는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고타마에 못지 않게 필연의 이치를 깨닫고 있었네. 그는 완성된 자이자 성자였네. 고빈다,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내고 체험하고, 지니고 다닐 수도 있고,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로써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이지. 모두 다 전체성이나 완전성,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지. 그리하여 세존 고타마께서도 이 세상에 대해 설법하실 때,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로 나누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그러나 이 세계 자체, 우리 주위에 있으며 우리 내면에도 현존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일면적인 것이 아니네. 한 인간이나 한 행위가 전적인 윤회나 전적인 열반인 경우란 결코 없으며, 한 인간이 온통 신성하거나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란 결코 없네. 그런데도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시간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네.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고빈다, 나는 이것을 몇 번이나 거듭하여 체험하였네. 그리고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현세와 영원 사이, 번뇌와 행복 사이, 선과 악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간격이라는 것도 하나의 착각인 셈이지

 

고빈다가 어째서 그런지 묻자 나도 죄인이고 자네도 죄인이야. 그 죄인의 내면에는 이미 미래의 부처가 깃들어 있어. 모든 중생 개개인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바로 그 생성되고 있는 부처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네.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고, 죽어가는 사람도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모든 돌멩이는 하나하나가 제각기 독특한 것이며, 제각기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옴을 읊조리고 있으니, 돌멩이 하나하나가 바라문인 셈이지. 말이란 신비로운 참뜻을 훼손해 버리는 법일세. 무슨 일이든 일단 말로 표현하게 되면 그 즉시 본래의 참뜻이 언제나 약간 달라져 버리고, 불순물이 섞여 변조되고, 약간 어리석게 되어버리지. 나는 바로 그 돌멩이를, 그 강을,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관찰함으로써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이 모든 사물들을 사랑하고 있어.

 

그렇지만 나는 말은 사랑할 수가 없지. 그 때문에 나에게는 가르침이라는 것이 아무 쓸모가 없는 거야. 자네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가르침이라는 것, 바로 그 무수한 말들이 아닐까 싶어. 해탈과 미덕이라는 것도, 윤회와 열반이라는 것도 순전한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야. 우리가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지.

 

나는 사상과 말을 구별하지 않는 입장이야. 사상이라는 것도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사물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 나의 성자인 바주데바는 스승도 없고 책도 없이 자네나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던 거야.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그가 강을 믿었기 때문이지.

 

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의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 나에게는 말보다는 사물이 더 마음에 들며, 고타마 그분의 행위와 삶이 그분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며, 그분의 손짓이 그분의 사상들보다 더 중요해. 나는 그분의 위대성이 그분의 말씀, 그분의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분의 행위, 그분의 삶에 있다고 생각해.”

 

고빈다가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맞춤하자 놀라운 형상들이 보입니다. 모든 형상들과 얼굴들은 멈추어 서기도 하고, 흘러가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떠내려가기도 하다가 마침내 뒤섞여 하나가 되어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흘러가는 온갖 형상들을 내려다보며 던지는 이 단일성의 미소, 수천의 태어남과 죽음을 내려다보며 던지는 동시성의 미소, 싯다르타의 이 미소야말로 자신이 수백 번이나 외경심을 품고 우러러 보았던 바로 그 부처 고타마의 미소와 똑같았습니다. 싯다르타의 미소는 그에게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사랑했던 모든 것, 가치 있고 신성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을 떠오르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싯다르타에게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절을 올렸습니다.

싯다르타가 가는 길은 수많은 자기 발전의 단계를 거치며 결국 생의 막바지에는 단일성의 환상 속에서 자기 완성에 이릅니다. 영원히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현존하는 강물을 보며 단일 사상을 깨달은 싯다르타에게는 정신과 자연, 사상과 육욕, 선과 악의 대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단일성의 일부로 똑같이 긍정됩니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이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다”라고 말한 헤세는, 끊임없이 시대의 병과 위기를 고발하며 내면의 길을 걸으며 자아 해방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고매한 정신과 시적 문체는 방황하는 젊은이들과 고뇌하는 지식인들을 섬세한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집니다. 자기 실현을 위해 참 자아에 이르는 내면의 길을 걷는 것, 이것이 바로 깊은 불안에 빠진 시대의 혼란과 가치 전도에 대한 헤세의 대답이었습니다.

 

오늘도 헛헛한 가슴을 안고 영혼의 자유와 행복, 평화를 갈망하는 당신께 자신의 가치관을 깊이 숙성시켜 그 누구의 길도 아닌 자신만의 길을 가라고 조언하는 인생책, ‘싯다르타를 추천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y5hMv1LmlQ&t=250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