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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생텍쥐페리의 삶과 문학 총정리!

힐링북 2021. 10. 29. 11:58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 생텍쥐페리

오늘은 1943년 출간돼 2억 부 이상 판매되며 20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며 성경 다음으로 사랑 받는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어린 왕자> 저자이자, 프랑스 작가이자 비행사였던 앙투안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 1900~1944)의 삶과 문학을 소개해 드릴게요.

생텍쥐페리는 1900 6 29 프랑스 리옹에서 귀족 출신인 마리 생텍쥐페리 백작의 2 3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4 아버지가 돌아가신 5남매는 생모리스 르망에 있는 숙모의 성과 몰에 있는 외할머니 성에서 숲과 정원을 뛰놀며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며 놀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의 헌신적인 사랑 속에 남다른 우애로 결속되어 행복한 유년을 보냈기에, 생텍쥐페리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과 영상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었고, 그의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핵이 되었습니다.

1909 르망으 이사하여 엄격한 예수회 학교에 입학하며 답답함을 느꼈지만, 역사와 고전에 관심을 가졌고, 무엇보다 그가 태어난 20세기는 비행기의 시대로, 1903 라이트 형제의 비행 이후 세계 젊은이들은 비행기에 열광했습니다.

1909 프랑스인 루이 블레리오(Louis Charles Joseph Bleriot, 1872~1936) 비행기로 영불해협 횡단에 성공하자 당시 프랑스인들의 비행에 대한 국민적 열광에 생텍쥐페리도 휩쓸리게 됩니다. 때마침 비행장과 조종사 양성 학교가 생모리스 인근에 세워지면서 1912 조종사 명이 그를 태우고 짧은 비행을 시켜주며 가슴 뛰는 경험은 꿈이 되고, 시가 되어 이후 비행과 문학은 생텍쥐페리의 인생이 됩니다.

그는 당대의 유명 작가인 발자크, 보들레르, 도스토옙스키 등의 작품에 깊이 빠져들지만, 1917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던 사랑하는 남동생 프랑수아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졌고, 이때부터 인간이 없는 죽음이라는 것에 깊이 천착하여 훗날 <어린왕자(Le Petit Prince)> 비극적 결말의 모티프가 됩니다.

1919 해군사관학교 입시에 낙방한 그는 파리미술학교 건축학과의 청강생으로 공부하는데요, 이는 훗날 어린 왕자의 삽화를 직접 그리는 자양분이 됩니다. 주위 사람들은 생텍쥐페리가 그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고 회고하며, <어린 왕자> 그림을 먼저 완성하고 나중에 글을 덧붙인 것이라  정도로 그에게 그림은 중요한 자기 표현 수단이었고, 편지나 일기 혹은 낙서 속에도 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드디어 1921 군에 입대하여 항공 정비병으로 근무하며 군용기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고, 민간 비행사 시험에도 합격하며 그는 꿈에 한발 다가서는데요, 1922 소위로 임관하고 부르제  33비행연대 정찰부대에 근무하며 시인이자 소설가인 루이즈 빌모랭과 약혼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에선 위험천만한 직업을 가진 생텍쥐페리를 반대하고, 우려는 현실이 되어 1923 정찰비행 항공기가 추락하면서 두개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소위로 제대, 회계사로 취직하지만 결코 조종사의 꿈을 버릴 없었습니다. 약혼녀는 위험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생텍쥐페리와 자주 다퉜고, 결국 파혼하게 됩니다.

 

제품 검사원, 자동차 세일즈맨 몇몇 회사를 전전하며 시와 소설 습작에 몰두한 그는 1925 앙드레지드, 프레보와 친분을 맺으며 1926 잡지사 편집장이었던 프레보(Jean Prevost) 주선으로 <남방 우편기> 초고에 해당하는 단편소설  <비행사(L’Aviateur)> 발표합니다.

1926 항공사에 취직해 본격적으로 조종사 일에 몰두한 그는, 당시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항공로를 개척하려던 에어 프랑스의 전신인 라테코에르 항공사에 취직해 정기우편비행을 담당하며 초기 항공 우편 개척의 역사를 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당시 비행기는 쉽게 부서졌고, 엔진은 불안정했으며, 항로 조정 장치의 정확도도 떨어져 비행기는 6번에 한번 꼴로 고장 나거나 사고를 당했고, 온갖 위험 속에서 우편물을 전달해 주는 일은 인간과 인간을 하나로 엮어주는 가장 숭고한 사명이었습니다.

 

그에게 비행은 단순한 직업 이상의 모험과 사색의 연장이었고, 역경을 함께 겪으며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며 맛보는 동료애와 연대감, 책임감이야말로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단 하나의 진실로 여기며, 작품세계의 근간 되었습니다.

항로가 연장되면서 생텍쥐페리는 1927 중간 기착지인 사하라 쥐비곶의 비행장 책임자로 파견근무를 하며 사막에 불시착한 항공기 수리와 조난 비행사 구조 업무를 병행하는데요, 이때의 경험을 담은 소설 <남방 우편기> 1929 출간되며 작가로 본격 데뷔합니다. 작품은 훗날 영화화 되었고, 생텍쥐페리가 직접 비행사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아르헨티나 항공우편 회사의 개발 과장으로 부임한 그는 민간항공부문 공로 훈장을 받지만, 1930 가장 친한 동료인 '기요메' 안데스산맥 횡단비행 폭설이 쌓인 산속에 추락해 실종되자 닷새 동안 수색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얼마 기요메는 안데스산맥을 밤낮으로 걸어 생환하게 됩니다.

기적 같은 일화 훗날 <인간의 대지> 자세히 소개되었고, 친구의 영향과 자신의 경험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1931 출간된 <야간비행(Vol de nuit)>으로, 페미나 (Pric Fenina) 수상하며 여러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고, 영화화되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같은 엘살바도르 출신의 아름답지만 까다로운 미망인 콘수엘로 순신과 결혼하는데요, 번의 결혼과 사별 경험이 있는 그녀를 생텍쥐페리의 가족들은 아주 싫어했고, 결혼생활도 불화의 연속이었지만, 그녀는 <어린 왕자> 돌아가야 목적지 장미의 모델이 것은 물론, 짧은 곱슬머리에 머플러를 두른 매력적인 자태는 어린 왕자의 모습에도 영감을 줍니다.

1935 자신의 개인 전용기를 구매하여 파리-사이공 비행시간 신기록 달성을 위해 이집트로 출발한 생텍쥐페리는 비행기 결함으로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게 되고, 5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어 파리로 귀국하는데요, 이때의 경험은 훗날 <어린 왕자> 배경이 됩니다.

 

행동주의 작가였던 그는 1936 신문사의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란을 취재하고, 카탈로니아 전선에서 현지 보고를 보내게 되는데요, “인간의 위대함이란 항상 자신을 초월하여 행동하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이 자신의 이해관계만 추구하게 되면 그는 그지없이 참혹하고 비참해지는 반면,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할 있을 존경과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생각했습니다.

1936 그는 인생에 대한 탐구와 명상을 토대로 <성채(Citadelle)> 집필을 시작했고, 1938 뉴욕과 남미 대륙 최남단을 연결하는 장거리 비행을 계획하지만, 비행기를 이륙하던 추락하여 다섯 번째 사고를 당합니다. 중상을 입고 뉴욕에서 치료받는 동안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 집필하고 프랑스에 귀국합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에게는 비행하는 것이나 글을 쓰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다. 중요한 것은 행동하는 것과 자기 안에 좌표를 밝히는 일이다. 비행사와 작가는 똑같은 자각 속에 융합되는 것이다.라며, 1939 <인간의 대지> 출간하여 아카데미프랑세즈의 소설대상을 받고 영화화되며 뉴욕에서도 <바람, 모래와 별들>이란 제목으로 영문판이 출간되어 반향을 불러 일으킵니다.

 

일본 에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생텍쥐페리의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하며, 특히 <인간의 대지> 그가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책으로, 일본어 번역판 표지 그림을 직접 그릴 정도로 좋아했습니다.

1939 2 세계대전 발발로 대위로 소집된 생텍쥐페리는 33비행정찰대에 배속되어, 각종 작전에 참여하지만, 결국 1940 프랑스 북부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자 아내 콘수엘로와 미국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는 집필에 전념하지만 동료 기요메가 죽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1941 33비행정찰대의 경험과 그가 수행했던 모든 임무를 바탕으로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 집필, 1942 영역(英譯)하여 <아라스로의 비행>이란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프랑스에서도 출간됐지만 독일 점령 당시 당국에 의해 발매 금지 처분을 받습니다.

‘미국이 정오일 프랑스에선 해가 진다. 그러니 해지는 것을 보려면 1안에 프랑스로 달려갈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프랑스는 너무 멀리 있다.라고 말한 그는 극단적 이데올로기주의자들을 경멸하고, 프랑스 정치가들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취해 프랑스에서도 독일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 혼란스러운 망명생활을 하며 뉴욕에서 지내던 어느 미국의 출판업자 '유진 레이널' 저녁식사를 하게 됩니다.

생텍쥐페리가 냅킨에 낙서로 그린 어린 아이 그림을 보고, 레이널은 아이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면 좋겠다는 제안했고, ‘동화가 삶의 유일한 진실임을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다’ 생각한 생텍쥐페리는 1942 오래 전부터 자신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어린 왕자를 꺼내 원고를 쓰기 시작합니다.

 1943 2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 출간되고, 드디어 4월에 그의 대표작 <어린 왕자> 뉴욕의 레이널&히치콕(Reynal&Hitchcock) 출판사에서 영어판과 불어판이 동시에 출간됩니다.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우화는 당시 문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며 단숨에 세계 명작 반열에 등극하고, 그는 세계적인 작가가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암울했습니다. 조국은 생텍쥐페리를 배척하고 비방했습니다. 중상모략으로 친독파로 알려지며 온갖 구설수에 올라 괴로워하던 그는 논쟁을 정면 돌파하고자 프랑스 군대에 재입대합니다.

43세의 늦은 나이와 성치 않은 몸으로 정찰대에 들어가지만 제한 연령인 35세가 지났기에 항공기를 운행할 없어 지상직을 수행하지만, 총사령관에게 청원하여 5회만 출격한다는 조건으로 정찰비행단에 복귀합니다.

 

​1944년 이미 5회의 출격을 초과하여 8회 출격 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출격하기로 한 7 31일 오전 8시 반, 여섯 시간 분의 연료를 채우고 홀로 정찰비행에 나선 그는 돌아오는 길에 향수에 젖어 유년의 고향을 우회한 후 지정 항로를 벗어나 예정 고도보다 낮게 비행합니다.

오래된 상처들로 가득한 육중한 몸으로 조종석에 불편하게 끼여 앉았던 탓에 그의 시야는 제한적이었고, 어쩌면 자신을 공격하는 비행기를 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비행이었습니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전시상황이라 사고 원인은 조사되지 못한 채 실종, 사망처리 됩니다. 이후 친구들이 생텍쥐페리의 녹음본과 초벌 원고를 정리하여 1948년 유작, <성채>를 발표합니다.

33 비행대의 젊은 장교는 그가 사라진날 비행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동료이자 신념의 견본과도 같은 사나이였던 그를 우리는 잃었다. 그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위험을 함께하려 것은 이미 드높았던 이력에 헛된 영예를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마음속으로 그렇게 하기를 진정 원했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는 위인의 반열에 드는 인물이다.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존중할 알면서 삶을 직시하는 그런 위인 말이다.

그렇게 생텍쥐페리의 죽음이 잊혀져 가던 1998, 마르세유 남동쪽 바다에서 어부가 던진 그물에 우연히 그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가 발견되고, 그가 마지막에 탔던 비행기 잔해가 같은 해역에서 수거됩니다.

2008 3월에는 2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조종사였던 호르스트 리페르트가 인터뷰를 통해 “내가 생텍쥐페리가 타고 있던 비행기를 격추시켰다. 누구인지는 보지 못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였다. 만일 생텍쥐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쏘지 않았을 것”이라 고백해 그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종결됩니다.

늘 하늘을 그리워하고 하늘에 살며 떠오르는 감정들을 빛나는 시적 문체로 써내려간 그는, 문학의 지평을 하늘과 우주로 넓혔습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인간의 대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새로운 사색과 발견의 장으로 그 공간을 더욱 깊고 원숙하게 그려낸 그의 작품들 속에는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공간, 잃어버린 존재를 추억하며 영혼의 성장을 이루려던 소망이 알알이 맺혀있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UX0vpqghb1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