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가와 책 소개

헤르만 헤세 삶과 문학 총정리!

힐링북 2021. 8. 7. 16:25

내면의 빛,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프롤로그 中

 

오늘은 제가 사랑하는 작가이자,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독일계 스위스인 소설가이자 시인인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삶과 문학을 소개해 드릴게요

1899년 헤르만 헤세와 그의 부모

헤르만 헤세 1877년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의 칼브(Calw)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와 신학계 집안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외조부 헤르만 군데르트는 뛰어난 신학자로 인도에서 다년간 포교 활동을 했고, 그의 인격과 인도학, 수천 권의 장서는 헤세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헤세는 가문의 전통을 잇기 위해 1890년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 어려운 주() 시험을 돌파하여 명문 신학교에 들어가지만, 뜨거운 창작열과 자유롭고 생명력 넘치는 삶에 대한 갈망으로 열네 살인 1891 ‘시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뒤 신학교의 권위적이고 속박된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주합니다. 학교 부적응으로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우울증과 신경쇠약증, 짝사랑까지 겹치면서 급기야 자살기도를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노이로제 회복 후 다시 칸슈타트 김나지움(인문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일 년도 못 되어 퇴학하는 등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1906년 출간, 헤세의 질풍노도의 청소년기가 담긴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이때의 상황은 후에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Unterm Rad, 1906)’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데요, 헤세 스스로도 “방황하는 내 소설 속의 주인공들, 그건 나 자신이었다”고 고백합니다.

20살 청년 헤세의 모습

열일곱 살인 1894년 고향 칼브의 시계공장 견습공으로 일하다 1895년부터 9년간 대학촌 서점에서 일하게 된 헤세는 문학수업과 글쓰기를 시작하며 비로소 삶의 안정을 되찾게 됩니다.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한 그는 스물두 살인 1899년 첫 시집 낭만의 노래(Romantische Lieder, 1899)’를 발표하여 릴케의 인정을 받았고, 스물일곱 살인 1904년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Peter Camenzind)’로 독일어권에서 유명한 작가가 되어 확고한 문학적 지위를 얻게 됩니다.

 

헤세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베르누이

같은 해에 아홉 살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하고 스위스 접경지역인 가이엔호펜에 정착하여 성공적인 작가의 길을 걸으며 세 아들의 아빠가 되지만, 안정된 삶에 권태를 느껴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작품을 쓰다 1912년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합니다.

 

서른 일곱 살인 1914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포로 구호 기구에 복무하며 전쟁포로들과 억류자들을 위한 잡지를 발행하고, 출판사를 만들어 1918~19년까지 스물두 권의 소책자를 펴냅니다. 반전 평화주의자였던 헤세는 수많은 정치적 논문, 경고호소문, 공개서한 등을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신문과 잡지들에 발표하면서 독일의 극우파들에게 조국의 배신자, 매국노라는 지탄뿐 아니라, 그의 저서가 판매와 출판 금지 처분을 받게 됩니다.

 

스위스 몬타뇰라로 이사한 1919년을 전후로 헤세는 개인적인 삶에도 커다란 위기를 겪게 되는데요, 자신의 재산까지 털어 외국에 잡혀 있는 독일군 포로들을 도와주었지만, 부친의 사망과 아내의 정신분열증, 막내아들의 병(뇌수막염)이 겹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신경쇠약증이 재발하여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다 융 학파의 정신과 의사인 요젭 베른하르트 랑(Josef Bernhard Lang) 박사에게 심리치료를 받게 됩니다. 랑 박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진정한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라”고 조언했고, 헤세는 ‘자신이 흔들렸던 건 옳은 신념을 가지고도 스스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후 작품 세계도 전환점을 맞아 서정적이며 향토적인 작가에서, 자신의 내면을 더욱 깊이 탐구하고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을 담는 구도적인 작가로 변모하게 됩니다.

1919년 영혼의 자서전, '데미안' 에밀 싱클레어 가명으로 발표

헤세는 당시 의학심리학의 대가였던 칼 구스타프 융도 만나는데요, 닷새 후 꿈속에서 실제 ‘데미안’의 등장인물들을 만났다고 하며,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데미안’을 발표하여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20년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을 출간합니다.

이후 꾸준히 진정한 나를 찾아 내면으로 가는 길’을 지향하며 현실과 대결하는 영혼의 모습을 그려 전세계 독자들을 매료시킵니다. 그림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인데요, 그는 이후 음악과 더불어 그림을 평생지기로 여기며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고, 3000여 점의 수채화를 남겼습니다.

심리치료를 위해 시작한 그림 그리기에 매료, 3000여 점의 수채화를 남긴 헤세

헤세는 인도 여행 후 마흔다섯 살인 1922, ‘싯다르타(Siddhartha)를 출간하며 동서양을 아우르는 무르익은 깨달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문학적 성취와는 반대로 가정사는 복잡해져 마흔여섯 살인 1923년 부인과 이혼하고, 1년 뒤 루트 벵어와 재혼하지만, 3년 만에 다시 이혼하고, 1931년 니논 돌빈과 재혼합니다.

헤세의 두 번째 부인 루트 벵거, 3년만에 이혼
헤세의 오랜 팬이었던 세 번째 부인 니논 돌빈과 재혼 후 죽을 때까지 함께함

그 와중에도 창작을 멈추지 않아 1927황야의 이리(Der Steppenwolf)’, 1930나르치스와 골드문트(Narziss und Goldmund, 지와 사랑)를 발표하고, 드디어 1931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1943년 발표해 헤세에게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안겨준 유리알 유희((Das Glasperlenspiel)’를 출간합니다.

1931년 집필 시작, 1943년 발표해 헤세에게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안겨준 '유리알 유희'

이 시기는 나치시대와도 일치하는데요, 히틀러의 광풍이 한창이던 암흑시대에 쓴 헤세의 후기 대표작 유리알 유희는 죄악과 야만이 폭풍처럼 몰아치던 시기에 작품 안에 평화와 자유의 유토피아를 창조하며 동서양의 음악, 문학, 철학, 신학을 종합해냅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헤세의 저서들이 불온서적으로 간주되어, 2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39~45년까지 더 이상 인쇄되지 못해 그의 전집도 스위스 출판사에서 출간됩니다. 결국 히틀러는 1945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1946년 헤세의 작품들이 다시 독일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헤세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됩니다.

1962 89일 몬타뇰라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실현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 헤르만 헤세는 이밖에 단편집, 시집, 우화집, 여행기, 평론, 수필집, 서한집 등 다수 간행물을 출간하며 세계인의 사랑을 받다가 85세인 1962년 뇌출혈로 사망한 뒤 아본디오 묘지에 안치됩니다.

 

"이미 당신은 완전하므로 스스로를 경험하고 발견하라”고 말하는 헤세는 평소 자연 속에서 정원을 가꾸고, 토마토를 키우고, 낙엽 태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평생 인간의 삶과 내면의 모습을 탐구한 그는 음악과 미술, 평화와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사랑했습니다. 인류의 정신적 스승으로 영원히 남을 그의 작품들은 세계인들에게 지금도 많은 영감을 주며, 내면으로 향하는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IG-oXg94qg